1970년대에는 팩스는 이제 막 실용화 시작 단계였고, 인터넷은 없던 시절. 텔렉스가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면 밤새 도착한 텔렉스를 통신실에 찾아가서 수신된 내용을 꼼꼼히 점검한다. 오늘은 또 어떤 문제가 터졌나 하는 조바심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새벽에 출근하는 정세영 사장님께서 해외에서 들어온 텔렉스를 먼저 읽고는 대리점의 불만이 있으면 담당자들이 불려가 혼나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래서 모든 부서장은 서로 경쟁하듯이 먼저 출근하여 텔렉스를 점검하고 문제에 대한 이유와 해결 방안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가 호출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내가 1977년 3월에 해외 부품부의 상황이 어땠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해외부품부의 부서장은 차장이었다. 이 분은 마침 남미 출장 중이어서 면접 그리고 첫 출근하는 날도 대면을 할 수 없었다. 본사조직으로는 대리가 두 명, 사원이 두 명 그리고 기능직 여사원 한 명 이였고, 울산 공장에는 생산용 자재 창고의 한 구석에 삼사십 평 남짓한 공간을 빌려서 사무실 겸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입고 포장담당 직원인 기능직 사원이 열 두세 명이 있었다. 이게 전부였다.

해외 대리점에 공급해야 할 부품은 대부분 국산화가 되어 있었지만, 기능상 중요한 파워트레인 계통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품부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 조립생산용 수입품을 관장하는 KD 자재부에서 차용, 분해하여 대리점에 선적하는 방식으로 임시변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리점에서 요구하는 부품을 제대로 공급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맞으면서 배운다

잔뜩 긴장하고 대리점 사장실에 도착하여 사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대리점 사장은 이름이 쉐이크 알 칼리파, 이름 앞에 쉐이크라는 호칭이 붙어 있는 것은 왕족이라는 것인데 이 사람도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사돈의 팔촌 정도나 되나?

대리점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본격적으로 회의기 시작되었다. 대리점 사장은 현대자동차 본사에서 부품담당자가 방문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주한 부품이 아직도 선적되지 않아 고장 난 자동차를 수리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품이 없어 고객에게 판매 대기 중인 차에서 부품을 떼어다 수리를 한다고 했다.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부품을 떼어낸 차들을 나한테 보여주며 현실을 확인시켰다. 이렇게 백오더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더니, 이어 주문한 부품이 잘 못 선적되어 쓸모없는 부품이 싸여 있다거나 선적된 부품의 과부족 발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문제가 한꺼번에 내 앞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불만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뭐라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를 해외에 수출한다면서 수출한 차에 대한 아프터 서비스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당시 해외판매 총괄 상무께(지금의 본부장 격) 해외 부품부가 갖춰야할 것들을 건의한 바 있었다. 이런 것을 들어주지 않은 본사 최고 경영진이 원망스러웠다. 대부분 불만은 선적 지연이였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해외부품부는 아프터 서비스를 위한 업무체계가 없었다.

지엠 코리아를 떠나 현대차 해외 판매부의 해외부품부에 배속되어 업무 파악을 하고있을 때 쯤이었다.  기대했던 업무 체계도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다. 직속 상사인 차장한테 건의를 했었다. 재고관리는 어디서 누가 하며 부품 창고는 어디 있는가? 이 양반 대답이 걸작이다. 사장님은 창고의 '창'자도 듣기 싫어하니까 아예 그런 말 하지도 말라는 거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루는 퇴근후에 소주 한잔 하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술김에 마음에 품었던 말을 다시 했다. 어떻게 부품부를 운영할 꺼냐구... 원래 어려운 건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중역이 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그 보다는 부차장으로 내려 갈 수록 말하기 쉬운 거라는데 차장님께서 말씀 올리기 어렵겠다면 내가 사장한테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분 되게 기분 나빴을텐데 그 자리에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미 부품본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 되어있지 않은 것을 입사 후에 바로 간파하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해외판매사업부장에 보고했던 사항들  조직 개선 강화와 부품 데포 확보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부품 조달 기능, 재고관리 기능, 부품 물류관리를 위한 창고와 인력 확보의 필요성에 대하여 무려 7년동안 매년 사업계획을 올렸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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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23:12 2012/05/2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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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잉여토기  수정/삭제  댓글쓰기

    7년이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니
    굉장히 긴 기간 동안 그대로였군요.

    2012/05/25 00:06
    • mark  수정/삭제

      실무자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기간이.. 여건이 되지 않은 샹태에서 성과를 바라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죠.

      2012/05/25 14:39
  2. 김치군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군요 ㅠㅠ..

    오늘 텔렉스라는걸 처음 알았어요^^

    2012/05/24 17:29
    • mark  수정/삭제

      김치군님 나이를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은 못하지만 옛날 이야기인 것은 맞아요. 30-40년전의 이야기를 후배들한테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2012/05/24 20:33
  3. 롤패  수정/삭제  댓글쓰기

    텔렉스가 뭔가요? 검색 해 봐야겠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이군요. ㅎㅎ
    해피엔딩이 기대가 됩니다. ^^*

    추신) 텔렉스 지금 보고 왔습니다. ㅎㅎ 특이하군요. 약자도 쓰고 말이죠. 아침부터 암호 해석하셨겠습니다. ㅠㅠ

    2012/05/24 16:03
    • mark  수정/삭제

      전송되는 시간을 줄이려고 약자를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잘못 해석되는 경우도 있었구요. 어슬픈 영어로 출장자와 본사간의 주고받는 텔렉스 내용도 지금 보면 웃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ㅎㅎㅎ

      2012/05/24 20:31
  4. 용작가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 잘 읽었습니다 ^^

    2012/05/24 12:50
    • mark  수정/삭제

      무모했죠. 그러면서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선두에 서 있다는 자부심은 대단했었답니다. ^^

      2012/05/24 20:28
  5. Daniel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두 텔렉스란 말 첨 들어보네요..

    2012/05/24 09:40
  6. 와이군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어떻게 할수 있는 권한이 없는 상황에서 고객불만을 받으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뛰죠.
    보고 있는 제가 화가 나네요.
    정말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ㅠ.ㅜ

    2012/05/24 00:27
  7. 빨간내복  수정/삭제  댓글쓰기

    텔렉스라는 말조차 오랜만에 듣습니다. 물론, 전 본적은 없습니다. ㅎㅎ

    2012/05/23 15:06
    • mark  수정/삭제

      사무실에서 텔렉스를 다른 부서보다 먼저 보려고 씨름했을 때가 1980년대 까지였으니.. 30년 전인 거 같습니다. 아, 세월이여!

      2012/05/23 15:33
  8. 풀칠아비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장님께서는 창고의 '창'자도 싫어하셨군요.^^
    요즘의 아프터 서비스 체계와는 많이 비교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이 생각나네요.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수요일 보내세요.

    2012/05/23 11:58
    • mark  수정/삭제

      돌아가신 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참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부품창고 없이 어떻게 대리점에 부품을 공급하라고..

      2012/05/23 13:42
  9. 핑구야 날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모두 이해하지 않을까요...

    2012/05/23 08:12
    • mark  수정/삭제

      한 마디로 준비되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봅니다.

      2012/05/23 10:16
  10. 걷다보면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맨땅에 헤딩하기 였군요
    저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니 저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끌려다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2012/05/23 05:16
    • mark  수정/삭제

      한마디로 만당에 헤딩했다는 말이 맞네요. ㅎㅎ

      2012/05/23 10:15
  11. 꿈사냥꾼  수정/삭제  댓글쓰기

    쭉 읽다보니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 많네요.
    재미있기도 하고요 ^^

    2009/07/03 23:28
    • Mark  수정/삭제

      겁 없다고 해야하나, 무모했다고 해도 될 것 가네요. 요즘 같으면 전혀 될 일이 아니지요.

      2009/07/03 23:36
  12. 홍천댁이윤영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시절엔 그랬었군요^^ 텔렉스... 열심히 일하셨던 모습이 그려집니다.
    멋져보이는데요^^

    2009/04/18 21:04
  13. Rubymelon  수정/삭제  댓글쓰기

    팩스는 많이 접해봤지만 텔렉스는 처음 듣게되서 한번 찾아봤어요. 왠지 모두들 텔렉스 앞으로 달려가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보일듯하네요. 개인적으로 새로운 토픽에 대해서 읽고 배워가니까 신선하네요!

    2009/04/18 00:45
    • Mark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기억 나는대로 순서도 없이 써갑니다.

      2009/04/18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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